
지난 7월 20일, EU 집행위원회가 운영하는 디지털 제품 여권(DPP, Digital Product Passport) 레지스트리가 가동을 시작했습니다. 개별 제품에 고유 식별자를 부여하고 관련 메타데이터를 등록하는 EU 차원의 인프라가 실제 운영 단계에 진입한 것입니다. 이어 8월에는 레지스트리 운영 규칙을 규정한 이행규정이 발효되었으며, 2027년 2월 18일에는 배터리 여권 의무화라는 첫 번째 기한이 도래합니다. 지속가능성 공시가 ‘기업’을 단위로 삼아왔다면, DPP는 그 단위를 ‘제품’ 하나로 세분화하는 제도적 장치입니다. 이번 블로그에서는 DPP의 법적 토대인 EU 에코디자인 규정(ESPR)의 내용과 적용 일정을 살펴본 후, 국내 기업이 준비해야 할 사항을 정리합니다.
1. ESPR의 구조와 DPP의 역할
(1) 에너지 관련 제품에서 전 제품군으로의 확장
DPP의 법적 근거는 2024년 7월 발효된 지속가능제품 에코디자인 규정(ESPR, Ecodesign for Sustainable Products Regulation)입니다. 종전의 에코디자인 지침(Ecodesign Directive)이 냉장고나 모터 등 에너지 관련 제품의 효율 기준을 규율하는 데 그쳤던 반면, ESPR은 식품·사료·의약품 등 일부 예외를 제외한 EU 시장 대다수의 물리적 제품을 잠재적 규제 대상으로 설정합니다. 내구성, 수리 가능성, 재활용 함량, 탄소발자국과 환경발자국 등의 요구사항을 제품군별 위임법(Delegated Act)으로 정하고, 해당 정보를 수록하여 유통하는 수단이 DPP입니다.
규제의 적용 범위는 2025년 4월 발표된 제1차 ESPR 작업계획(2025~2030)에서 구체화되었습니다. 집행위는 섬유·가구·타이어·매트리스 등 최종재 4개 품목과 철강·알루미늄 등 중간재 2개 품목을 우선 대상으로 지정하였으며, 수리 가능성 점수와 전기전자제품의 재활용 함량 등 수평적 요건을 함께 다루기로 했습니다. 이 계획이 포괄하는 제품의 EU 내 연간 매출은 1조 유로 이상으로, EU 소비에서 비롯되는 기후 영향의 약 31%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철강·알루미늄이 첫 대상군에 포함되었다는 점은 CBAM(탄소국경조정제도)에 이어 EU가 기초 소재의 내재 배출량을 추가적인 경로를 통해 추적하겠다는 의도로 해석됩니다.
(2) DPP에 수록되는 정보
DPP는 단일한 중앙 데이터베이스가 아니라, 제품에 부착된 데이터 캐리어(QR 코드 또는 NFC 칩)를 통해 분산 저장된 정보에 접근하는 체계입니다. 여권에는 고유 제품 식별자와 제조사 정보를 기본으로, 해당 제품군의 위임법이 요구하는 지속가능성 정보가 수록됩니다. 탄소발자국, 재활용 원료 비율, 우려 물질 함유 여부, 수리·분해 정보, 예상 수명 등이 대표적입니다. 정보는 소비자·수리업자·재활용업자·시장감시당국 등 이해관계자별로 접근 범위가 차등 설계되어, 전체에 공개되는 정보와 특정 주체에 한해 제공되는 정보가 구분됩니다.
이러한 체계의 운영을 위해서는 기술 표준이 필요하며, 유럽표준화기구 CEN-CENELEC의 합동기술위원회 JTC 24가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2026년 5월 데이터 교환 형식, 식별자 규칙, 데이터 캐리어, 분산 저장, API, 상호운용성을 각각 규정하는 EN 18216~18223 표준 6종이 발행되었고, 같은 해 7월 15일 집행위원회 이행결정 (EU) 2026/1736을 통해 EU 관보에 조화표준으로 인용되었습니다. 접근 권한 관리와 정보 보안에 관한 표준은 같은 위원회에서 추가로 준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무 관점에서 주목할 점은 이러한 표준의 세부 내용보다 그 함의입니다. 바로 제품 단위 환경 정보가 사람이 읽는 보고서가 아니라 기계 판독이 가능한 구조화 데이터의 형태로 교환된다는 점, 그리고 제조사의 사업 종료 이후에도 여권 정보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2. 적용 일정: 배터리에서 철강으로
DPP 의무화의 첫 적용 대상은 ESPR이 아닌 EU 배터리 규정에 따른 배터리 여권입니다. 2027년 2월 18일부터 전기차 배터리, 경량 이동수단(LMT) 배터리, 2kWh를 초과하는 산업용 배터리를 EU 시장에 출시하는 사업자는 여권을 생성하고 유지해야 합니다. 책임 주체는 셀이나 소재 공급사가 아니라 완제품 배터리를 시장에 출시하는 사업자이지만, 여권에 수록되는 탄소발자국과 재활용 원료 정보는 공급망 상류에서 확보되어야 하므로 실질적인 데이터 요구는 소재·부품 기업에까지 미치게 됩니다.
다만 제도 측의 준비는 지연되고 있습니다. 배터리 규정 제77조 제9항에 따라 비공개 여권 데이터의 접근 권한을 정하는 이행법은 2026년 8월 18일까지 채택되어야 했으나, 집행위원회는 현재 해당 이행법의 채택 시점을 2026년 4분기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반면 기업의 의무 이행 시점은 변동이 없어, 기업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규칙을 전제로 접근 통제 체계를 설계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배터리에 이어 ESPR 품목이 순차적으로 적용됩니다. 집행위원회의 일정에 따르면 철강 위임법은 2026년 4분기 채택이 예상되며, 섬유·알루미늄·타이어는 2027년 하반기, 가구는 2028년, 매트리스와 전기전자제품의 재활용 함량 요건은 2029년으로 계획되어 있습니다. 위임법 채택 후에는 통상 최소 18개월의 유예 기간이 부여되므로, 철강 제품의 실제 DPP 의무는 이르면 2028년 전후에 적용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국내에서도 산업통상자원부 등 관계 부처가 2024년부터 한국형 DPP 데이터스페이스 구축을 추진하고 있으며, 2025년 7월 한-EU 에코디자인 포럼에서는 전자·철강·섬유·배터리·자동차 5개 업종을 대상으로 한 플랫폼 구축 현황과 함께 EU와의 데이터 호환성과 규격 상호인정이 과제로 논의되었습니다.
3. 기업의 준비 과제
(1) 자사 제품의 적용 여부와 시점 확인
첫 번째 과제는 규제의 적용 여부와 시점을 자사 제품에 대입하여 확인하는 것입니다. EU에 완제품을 직접 수출하는 경우와 EU 완제품 제조사에 소재·부품을 납품하는 경우는 법적 의무의 유무가 다르지만, 데이터 요구는 양쪽 모두에 도달합니다. 특히 배터리 소재·부품, 철강·알루미늄 중간재, 섬유 원단과 같이 공급망 상류에 위치한 기업은 고객사의 여권 작성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위치에 서게 되므로, 위임법 채택 일정과 유예 기간을 자사의 납품 계약 시점과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2) 사업장 배출량의 제품 단위 배분
DPP의 핵심 정보인 제품 탄소발자국은 사업장 단위 온실가스 인벤토리만으로는 산출되지 않습니다. 공정별 전기·연료 사용량과 원료 투입량을 기록하고, 이를 생산량 기준으로 개별 제품에 배분하는 전과정평가(LCA, Life Cycle Assessment) 기반의 산정 체계가 요구됩니다. 배터리 규정은 제품 탄소발자국 신고와 검증 의무를 규정하고 있으며(산정 방법론에 관한 위임법 채택 후 적용), 철강·알루미늄 위임법 역시 동일한 방향으로 설계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사업장 인벤토리가 공정 단위로 구분되어 있지 않다면, 이 작업에 우선적으로 착수해야 합니다.
(3) 협력사 데이터 수집 체계 구축
제품 탄소발자국의 상당 부분은 구매한 원료와 부품에서 발생합니다. 협력사로부터 어떤 항목을 어떤 양식과 주기로 수집할지, 증빙은 무엇으로 갈음할지를 사전에 정해 두지 않으면 고객사의 요구가 도착한 이후 매번 수작업으로 대응하게 됩니다. 재활용 원료 비율이나 우려 물질 정보와 같이 탄소 이외의 항목도 함께 요구되므로, 데이터 요청 양식은 탄소에 한정하지 않고 설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4) 규제 간 데이터의 재사용
KSSB 기후공시의 Scope 3 산정, CBAM 신고의 내재 배출량, DPP의 제품 탄소발자국은 형식만 다를 뿐, 결국 제품 하나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어느 단계에서 얼마나 배출이 발생했는지의 정보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공정 단위 활동데이터를 한곳에 축적하고 산정 근거와 증빙을 함께 관리하면 세 가지 요구에 동일한 데이터로 대응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규제마다 별도의 산정을 반복하게 됩니다. DPP가 요구하는 기계 판독형 데이터 교환은 결국 이러한 데이터가 개별 엑셀 파일이 아니라 구조화된 시스템 안에서 관리되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마치며
ESPR과 DPP는 EU 수출 기업에 국한된 사안으로 보이지만, 데이터 요구는 공급망을 통해 국내 소재·부품 기업에까지 전달됩니다. 배터리 여권 의무화까지 남은 기간은 4개월여이며, 철강 위임법은 연내 윤곽을 드러낼 전망입니다. 고객사의 요청이 도착하기 전에 제품 단위 배출 데이터를 어디까지 추적할 수 있는지 미리 점검하는 것이 DPP 대응의 출발점입니다.
엔츠는 온실가스 관리 솔루션 엔스코프와 기후 전문가의 컨설팅을 결합하여, 공정·시설 단위의 활동데이터 수집부터 배출량 산정, 증빙 관리까지 하나의 체계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사업장 인벤토리를 제품 단위 데이터로 연결하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거나, ESPR·DPP를 비롯한 EU 규제 대응 방향을 함께 검토하고자 하시는 경우 언제든지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